화가 강창열은

화단의 철학자라는 말이 딱 어울리리는 신비한 그림을 그린다.

다른 작가들과는 달리 그의 작품들은 특이하게도 보는 사람의

내면의 무의식을 어루만지는 난해한(?) 그림들이다.

그는 수년째 열린 시간이라는 이름으로 이런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

그런데 작가가 전하는 내용을 떠나 보여지는

이미지만으로도 작품은 이미 충분히 아름답다.



그그의 그림은 마치 분청사기를 보는 듯한

연한 베이지색 아이보리톤의 질박한 바탕에

사슴 물고기 독수리등의 친근한 한국적 동물들과 도자기들이

조형적으로 어우러져 있다 ,

하늘색을 주제색으로 여러 가지 다양한 중간톤의 색상을 사용하지만 ,

원색의 사용을 상당히 절제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담담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러므로 담백을 넘어 자칫 평범해 보이기까지하는 일련의 작품들에서

비범함과 경탄을 찾아내기란 일견 쉽지 않아보인다.

그러나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런 것들이야말로

작품 속에 숨어있는 내러티브를 ,절제된 색깔을 통하여

분명하게 전달하고저 하는 작가의 의도라는 사실을 금방 알 수있다.

열린시간이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구분되지 않는 시간이다.

동시에 공간의 구분도 없다.

따라서 나라는 개체와 너라는 개체의 구분 또한 무의미 하다는

사실에 까지 생각이 도달하게 되면,

지금까지의 닫혔던 우리의 시각이 마침내 열리고

작가의 작업들은 한꺼번에 우리에게 말을 걸기 시작할 것이다.

추신 : 그래서 그림남은 이번에 관심있는 청중들을 모시고

         이 난해한 그림의 세계로의 여행을 함께 떠나 볼까합니다.

        대단히 재미있는 작업이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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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3학년 국어교과서에 실린 문덕수의 현대시 해설은

당시 대학입시준비로 여념이 없던 필자에게 적지 않은 문화적 충격을 주었다.

시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입문서이자 현대시에 대한 총체적 평론 이었는데

명문장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구체적 내용은 이미 기억에서 가물가물 하지만 글의 요지는 대충 이랬던 것 같다.

'시인이 삶에서 건져낸 시어들이 하나하나가

모두다 나름대로의 의미와 예술성을 갗추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지만

잔잔한 감동이나 격정 그리고

삶이나 시대적 도전과의 맞주침에서 오는

희망과 절망 같은 순간의 감정들을 격하게 토해내거나

보드라운 시어로 싸서 세련되게 쓰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 것들을 어떤 관점에서 보았는가 그리고 그것들을 어떻게 승화시켰는가하는 것이다.'

이것이 드러나지 않으면 대시인이 되기는 어렵다는 것이고

이런 요소를 발견하고 그 감동을 올바르게 전달하는 것이

시문학 평론가의 올바른 자세라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시를 쓰고 비평하는 사람 뿐 아니라

시를 읽는 사람들의 의식 수준이 이런 사실을 갈파하고

감동을 받고 그 감동을 주변에 전하는 수준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교과서에 실린 그저 입시를 위해 뭐를 달달 외우려 했던

고3 수험생에게 처음부터 그 글이 그저 달달 외워햐 하는

시험지문에 불과한 글에서부터 필자의 인생전체를 관통하는 명문으로

인식을 고치게 된 계기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당시 종로에 있던 EMI학원의 국어 단과반 최고 인기 강사였던

오 선생님(이름은 기억이 안난다.)의 고3을 위한 입시국어강의였다.

그의 강의는 입시를 넘어선 진정한 입시 강의였다.

그는 국어시간이 외우는 시간이 아니라

이해하고 공감하는 시간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가르쳐준 고마운 분이다.

이해와 공감은 시를 읽고 감동받고 나아가 인생이 변하기 위하여

독자가 꼭 갗추어야 할 자세이자 소양이다.

이후 나는 영랑이나 소월보다는 청마 유치환과 이육사

그리고 윤동주와 조지훈의 시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그저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고 마음속에 일어나는 감동을

고운 보자기에 싸서 지면에 펼쳐놓는 것은 물론 멋진 일이지만,

격동하는 시대정신을 온몸으로 감당하고 행동하면서

고통과 비분을 아름다운 시어로 승화시키거나

파란만장한 인생의 과정에서 길어낸 깊은 관조의 세계를 짧은 시어로 압축하여

그 핵심을 집어내는 진정한 문학의 아름다움을 맛볼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진정한 멋이란 이를테면 대의(大義)가 실려 있는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하루 아침에 이룰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흉내 낸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박수근의 그림에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질박함 뿐 아니라 엄격함이 있다.

그런데 그의 엄격함은 그의 신산한 인생과 치열한 작가정신의 산물이지

그저 생업으로 그림을 팔고저하는 장사치의 의식에서는

결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생명력이 깃들어있다.

컬렉터가 이것을 갈파하고 구별할 줄 모른다면 ,

그가 수집한 그림들은 그저 자기만의 만족에 불과한 것이지 ,

타인과 결코 소통되지 못할, 소위 영원한 자기 것이 되기가 쉽다.

그림에 이른바 대의(大義)가 실려 있는 아름다움이 잘 드러나 있는

대표적인 작가중의 한분으로 추연근 화백을 들 수 있다.

그래서 이번 그림여행은 철학이 있는 그림의 추연근화백의 대표작을

재조명해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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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색채의 마법사 김석중작가가 새로 창조해낸 한 쌍의 말그림이 두점 있다.

근래에 본 적이 없는 특이한 색채와 조형으로 개인전에 출품 되자 마자

컬렉터들의 주목을 받았고 즉시 임자를 만났던 작품들이다.

제일 먼저 눈길이 가는 그림은

한눈에도 '포니 카페라떼'라는 별명이 저절로 떠오르는 조랑말 그림이다.

앞다리를 살짝 굽히고 엉덩이를 높이 치켜든 자세로

마치 장난감 나라에서 온 것처럼 핑크빛 하늘을 배경으로 둥실 떠다니는 풍경은

영락없이 깜찍한 암컷의 모습이다. 살짝 굽힌 미끈한 앞 다리가 그렇고 둥근 힙이 그렇다.

게다가 알록달록한 갈기와 안장은 모두 북구의 여성들이 털실로 짠 화려한 색상의

앞치마나 목도리처럼 이국적 여성스러움이 물씬 풍긴다.

말의 눈은 에메랄드로 주위를 두르고 눈동자로 빨간 루비가 장식되어 신비로운 분위기를 더한다. 차이코프스키원작의 호두까기 인형이나

만화 이상한 나라의 폴이 데리고 다니던 인형처럼

조랑말은 얼굴에 겹쳐진 핑크색 마법의 달빛에 취해 생명력을 얻었을 것이다.

안장위에서 피어난 커다란 앰버(호박석)칼라의 꽃 한송이는

풍선과 꽃의 이미지가 묘하게 겹치면서 마법에 취한 암컷의 부푼 마음을 대변한다.

좀 더 다가서보자 말의 몸통을 묘사한 기법이 재미있다.

커피색과 아이보리색이 서로 일정한 경계를 짓기는 하지만 붓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일종의 드립핑 기법이다.

먼저 화폭위에 말의 형태를 갖춘 틀을 만든 다음

그 위에 물감을 붓고 또 다른 물감을 붓는 방법으로 색상과 무늬를 만들어 나간다.

그렇게 하면 물감들의 화학적 성질에 따라 서로 엉기고 번지는 성질은

마치 물위에 유성 물감을 풀어 무늬를 만드는 마블링기법처럼

아무도 예측 못할 색채의 카오스(혼돈)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에 화가의 노련한 경험과 순간적 직관에 따라

붓으로 경계와 구획을 만들고 바람직한 흐름을 유도하면

그 다음은 그들끼리의 또 다른 짝짓기 놀이가 벌어지는 것이다.

결과 바리스타가 한 잔의 카페라테위에 즉석으로 휘저어 그려내는

멋진 라떼아트가 캔버스위에서 그림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참으로 시각과 미각이 완벽하게 융합되는 즐거움 가득한 그림이다.

 


(김석중, 일상-생성, 72cm x 60cm, Mixed on canvas2010)

암컷이 있다면 수컷도 있을 것이다.

화가가 묘사한 수컷은 중천에 뜬 태양을 등지고 서있는 탄탄한 근육과

유머러스한 얼굴 강인한 턱을 가진 멋진 놈이다. (아래그림)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상대적으로 작은 머리통과 눈부분의 묘사가 생략된 점이다.

남자에겐 이것들이 별로 필요치 않다는 뜻일까?

말의 몸통에 불끈 솟은 정맥의 힘을 흰색의 흐름으로

유난히 공을 들인 흔적에 비해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김석중, 일상-생성, 91cm x 65cm, Mixed on canvas2010)

ps)이 작품들은 앞서 말했다시피 전시장에서 바로 각자 주인을 만났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암컷은 남자고객에게 수컷은 여성고객에게 각각 팔려나갔으니

한국 컬렉터들의 수준도 이 정도면 능히 좋은 화가들과
충분히 교류할 수 있는 정도는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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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하시라 ,임진년 새해 첫날 그림 읽어주는 남자의 칼럼이 분노로 시작하게 되었다.

세계적인 아트 컬렉터인 찰스사치의 전폭적인 도움으로

그동안 천정부지의 그림 값을 자랑하던 데미안 허스트가 이제는 사치와 헤어지고 ,

뉴욕·런던·파리·로마·홍콩 등 전세계 8개 도시에 11개 지점을 두고 있는

가고시안 갤러리의 사장이자 또 다른 미술품 유통계의 세계적 거물인

래리 가고시안과 손을 잡고 전세계를 상대로

엄청난 미술품 전시 판매 이벤트를 벌이고 있다.

알약 그림과 데미안 허스트



허스트의 이런 이벤트는 그러나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08년 금융위기의 쓰나미 속에서도 런던 소더비 경매에 신작 223점을 내놓아

모두 2200억원어치를 팔아 치웠던 것이다.

세계적인 불경기에 어떻게 그런 일들이 가능했을까? 답은 엉뚱한 곳에 있었다.

이미 터무니 없는 엄청난 거액을 주고 그의 작품을 구입했던 화랑들과 큰 손들이

그의 이런 엉뚱한 물량공세를 미리 예측하지 못하고 크게 당황했던 것이다.

미리 팔아 치운 사람들이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겠지만,

대부분은 엉뚱하고 기괴한 것을 장끼로 하는 그의 그림의 특성상 당연히 작가에 의해

희소성이 적절히 관리될 것으로 여겼고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값이 크게 오를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이번이 마지막으로 다시는 알약 땡땡이를 안그린다 라는

작가의 믿지 못 할(?) 사탕발림도 있었다.

-이런 그의 행동은 악동이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화상들은 실망하면서도 기존의 재고를 위해 새로 대규모 물량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그냥 두고만 보지는 않았던 것이다.

같이 망할 수는 없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 할 수 도 있지만,

문제는 그다음 이었다.

이후 그의 작품 가격은 크게 떨어져 경매에서 유찰 사태가 속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작품성과는 전혀 무관하게 순전히 교묘한 마케팅만으로

엄청난 거품이 낀 채 거래가 지속된 결과로서는 당연한 귀결이었다.

이과정에서 가장 큰 손실을 본사람들은

멋모르고 허스트의 그림을 고가에 구입했던 컬렉터들이었다.

허스트나 그의 강력한 후원자이자 투자자였던 찰스사치는

이일로 인해 엄청난 부를 거머쥐었다.

마치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건의 복사판을 보는 듯하다.

랬던 허스트가 이번에도 4년 전과 똑같은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문제는 그의 알약 그림이 모두 벽지의 일부를 크기별로 오려 놓은 것처럼

똑같은 패턴의 개성 없는 복제품 같다는 데 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지난 20여 년간 만든 점화 1500여 점 중 작가가 직접 그린 것은

단 5점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조수들이 그린 그림에다가

작가가 싸인만 했다는 것인데 정말이지 해도 너무하는 것 같다.


 

전시장에서의 알약그림과 관객-단순한 관객이 아니라 연출된 모델임에 틀림없다.금발여인의 세련된 뒤태와 적절한 위치 선정,럭셔리한 의상과 소품등이 모두 절묘하게 그림과 매치되어있다. 그러나 실제로 파는 것은 모델이 아닌 그냥 땡땡이 그림일 뿐이다. 속지마시라! 이 또한 교묘한 마케팅의 일환일 뿐이니! /그림남 주


 

내가 아는 한 국내에는 이런 작가는 없을 뿐 아니라 ,

있다 하더라도 그런 작가가 발을 붙일 공간도 없다.

게다가 그가 자신의 알약 그림에 대하여 보충설명한다는 말이 또 가관이다.

“관객은 점과, 점들이 이루는 격자무늬 등 어디에 초점을 맞춰야 할지 당혹스러울 것”이었다니,

관객들이 자기 그림을 이해하려 애쓰는 것을 보고 즐기겠다는 심뽀 아닌가?

이 사람은 관객들이 틀림없이 자기그림을 좋아할 것이라는 엉뚱한 확신에 차있다.

그저 어이가 없을 뿐이다.

TV쑈 진품명품을 보라 .짝퉁은 가격이 아예 없다. 0원 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무엇에 초점을 맞추겠는가?

아무리 눈씻고 보아도 그저 똑같은 패턴의 눈 어지러운 벽지디자인 일 뿐인 것을!

어쩌다 그림 한 점만을 놓고 보면 그냥 밝고 화려한 그림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명색이 세계적이라는 데미안 허스트작이니까?

그런데 이런 그림과 똑같은 것이 1500점이 더 있고 그것도 작가가 직접그린 것도 아니라면?

그런 그림은 이제 더 이상 예술품이 아니라

호사가들의 가쉽꺼리로나 쓰는 일종의 생활잡화 일 뿐이다. ,

그런데도 이런 싸구려 벽지조각(?)을 최저 일억에서 20억이상을 주고 거래하는

믿지 못할 일들이 오늘날 우리 눈 앞에서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도 그들의 교묘한 마케팅에 내로라하는 화랑과 컬렉터들이 속절없이 당할 것인가?

세계 컬렉트들의 이목이 지금 가고시안 갤러리에 집중 되고 있다.

PS- 다행이다. 한국에는 없다. 이 망할 x의 가고시안 갤러리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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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를 좋아하긴 하지만 노래방에서 부를 수 있는 레파토리가

송창식, 최성수, 최백호에서 딱 멈춰버렸다.

워낙 그들의 노래정서를 좋아하다보니 익숙해진 탓도 있지만

그들 이 후에 나오는 가수들의 신곡들은 선율은 고사하고

가사가 영 유치해 보인 탓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중 최성수는 가사로만 보면 슬픈 이별을 가장 많이 해 본 사람처럼

노래가 ,뭐랄까? 하나같이 달콤하면서도 처연하다.

청승맞다고 하기에는 노래 속에 뭔가 중독성이 있는 단 맛이 들어있다.

즐겨본 사람이 뒤늦게 후회하게 되는 사랑의 달콤함, 뭐 그런 것일까?

그림 읽어 주는 남자가 그림을 설명 할 때처럼,

최성수는 담담하게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주변부터 찬찬히 이별의 슬픔을 설명한다.

따라 부르다 보면 어느새 그의 마법에 걸려 처연한 무드에 젖어들게 된다.

마음이 울적해졌을 때 가끔씩 부르곤 하는 그의 노래 중에 ‘장미의 눈물’이 있다.

“아 사랑이 무어냐? 눈물이잖아?/ 하늘보고 물어봐도 대답이 없구나 !

술과 장미에 젖어도, 마음 더욱 애~ 달~ 퍼~“

뭐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노래인데, 지난세월을 돌이켜 볼 때

술과 장미에 제대로 젖어(?)본 적도 없는 사람이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 다소 생뚱맞기는 하지만,

술과 장미라는 말은 예나 지금이나 남자의 영원한 로망이다.

노래를 따라 부르노라면 가슴 속 깊은 곳으로부터

산전수전 다 겪고 지금은 홀로된 훈남의 포스가 터져 나오니, 아 이런! 이건 또 뭐지?

최광선 작가는 자타가 공인 하는 장미의 연인이다.

졸저 “그림 읽어주는 남자...”에도 ‘푸른 시대’라는 제목의 비슷한 분위기의 작품을 소개하였다.

“그림 속의 푸르게 빛나는 장미는

이 한겨울 깊은 산속 외딴집 창가에서

온산과 집 앞개울의 물에 두루 쌓인 흰 눈과 더불어

달빛의 세례를 흠뻑 받아 잠을 설치고 있는 중이다.

창밖의 겨울의 냉기를 미쳐 느낄 사이도 없이,

쌓인 눈에 반사된 푸른 달빛에 매혹된 장미는

뜻모를 설레임에 달뜬 가슴을 온몸으로 푸르게 푸르게 뿜어내고 있다.“- 후략-




그런데 지금 소개하려는 작품 “휴식시간”은 같은 색조이지만 완전히 다른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장미 다발들은 드디어 내 뿜는 것을 멈추었다.

푸른빛을 내면으로 갈무리 한 채

본연의 색깔을 드러내면서 스스로를 돌아보고 있는 것일까?

꽃 하나하나에 작가의 따스한 눈길이 머물러 있다.

로마네스크풍의 유리 화병은 같은 양식의 아름다운 유리 접시와 함께 ,

쌍을 이루어 장미다발들을 단단히 받쳐주고 있다.

그리고 그 화병을 받쳐주는 테이블과 왼쪽에 치우쳐 깔끔하게 내리그은 수선은

몬드리안의 황금 면 분할이다.

나는 이런 그림이 좋다. 어설픈 욕망을 배설하듯 뿜어대는 여인보다는

서정주의 시 “국화옆에서” 처럼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선/내 누님 같이 생긴 꽃”,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고 있는 여인의 그 차분함이 좋다.

휴식시간이라는 제목에 어울리게 짙은 네이비톤이 배경을 뒤덮고 있다.

꽃과 화병의 사실적 묘사와는 달리 작가는 굳이 거친 귀얄 자욱을 숨기려하지 않는다.

마치 자!자!하고 화가가 강제로 짙은 코발트의 커텐을 쳐내려 가는 것처럼

꽃들의 휴식을 독려하고 있는 것 같다.

남색의 커텐들 속에 간간히 끊어질듯 이어지는 오렌지색의 가는 선들은

자칫 지나치게 차가와 보이는 분위기를 포근하게 바꾸어 주는 일종의 반전 코드다.

결론적으로 이 그림은 최 화백의 작품 중에서 수작에 속한다.

그분의 작품 중에서 이렇게 진한 푸른색 배경의 장미는 드믈다.

그리고 화병에 제대로 힘이 들어간 그림도 아주 흔치 않다.

마음이 번잡하고 가슴이 답답할 때 곁에두고 차분히 응시하고 싶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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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길 화백의 걸작 누드 ‘사춘기’를 드디어 재경매에서 만났다.

그동안 백화점 문화센터를 통해 학생들에게 수차례 소개 했을 정도로 이 그림에 대한 나의 관심은 각별한 것이었다.

그런 작품을 재경매에서 막상 발견 했을 때, 거짓말 좀 보태서 숨이 멎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할까? 경매에 참가해서 낙찰을 받아 버릴까? 생각 중인데,오늘 점심이 가까워서, 친한 분이 연락이 왔다.

이분은 나의 책을 사서 탐독 하신 다음, 책에 있는 컬렉션을 그대로 실천하시기로 마음을 먹으신듯, 책에 해설되어 있는 그림이 경매로 나오면 놓치시는 법이 없다.

‘ 아, 또 이렇게 주인은 따로 있는 모양이군?’ 나는 조용히 마음을 내려놓고 전화를 받았다.

“아, 그 그림 말이지요 ? 대단한 걸작입니다. 어떻해서든 손에 넣으세요.”

점심을 먹고 돌아와 들어가 보니 무사히 낙찰을 받으신 듯하다.

정말이지 복이 많은 컬렉터라는 생각이다.

이 글을 읽고 혹시 이 작품을 내 놓으신 분이 속이 많이 쓰릴까? 슬며시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기왕에 내 놓은 그림이 다른 분들의 많은 호응을 받아 자신의 심미안에 대한 자부심을 한껏 드높힐 기회가 되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충분히 즉구가로 갈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최정길 화백은 누드의 대가이기도 하다.

해서 이번 토요일 강의는 최정길의 누드를 중심으로한 그의 작품 세계를 중심으로 독자들과 좋은 시간을 가져보고 싶다.

추신 )이 그림의 해설은 저의 졸저 “그림 읽어주는 남자..”를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 하겠습니다.

토요일의 설명회에서는 이 그림에 대한 좀 더 자세한 해설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많이들 참가해주세요. ^^

최정길 사춘기(思春期)- 그림읽어주는 남자와 33인의 화가에서 발췌..

사춘기, 문자 그대로 봄을 생각하는 시기 ,아니 봄처럼 마음이 들뜨는 시기 일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봄에는 일조시수가 길어져 동물들이 짝짓기에 돌입하도록 되어있다고 하니 봄은 짝짓기의 계절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사춘기란 다름 아닌 짝짓기를 생각하는 시기라고 보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수 있겠다.

화가는 노련하게도 이 점을 정확히 갈파하고 이 그림을 그렸다

사실 이화가의 장기 중 하나가 여인의 내면을 정확히 갈파하고 화면에 끄집어내는 ,인물화 ,그 중에서도 누드라는 사실은 잠시 후면 실감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그림은 머리를 두 갈래로 땋아 늘어뜨린 사춘기 여고생의 뒷모습을 그린 누드이다.

소녀는 창틀로 쏟아지는 햇빛을 온몸으로 받고 서서 창밖의 꽃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방은 차가운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조그만 테이블과 침대로 이루어진 작고 비좁은 공간으로 어쩌면 소녀가 바라보고 있는 창문만이 유일한 탈출구인지도 모른다.

이번에도 화가는 자신의 상표와도 같은 푸른색을 곳곳에 끼워 놓았다.

창틀과 소녀의 머리칼 ,어깨와 허벅지 뒤편을 비롯하여 테이블보에 이르기까지 사실은 푸르지 않은 곳이 하나도 없다.

이 그림에서 푸른색은 희망과 우울함을 동시에 상징하는 이중적인 코드로 작용하므로 그림은 더욱 신비로운 분위기를 띄게 된다.

여인의 뒷 모습은 사춘기 소녀의 것으로는 어울리지 않게 부푼 엉덩이를 가진 점이 이채롭다.

부풀다는 단어를 쓸 정도로 이 엉덩이는 인생의 봄을 맞이하는 소녀의 부푼 기대감을 상징하는 중요한 아이콘으로 작용한다.

엉덩이는 생식의 상징이며 불룩한 가슴보다 더 원초적인 여성의 2차성징 ,즉 사춘기의 증거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그림은 보는 관객들의 마음마저 설레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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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보기

어느 날 이 화가는 더위에 지쳐 나무그늘에 쉬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삶에도 지쳤을지도 모르겠다.

목이 말랐을지도 모른다.

햇살이 찬란한 하늘을 올려다보는 시각이 그 시선이 그렇다.

굳이 나무둥치를 찬찬이 살피고 둥치를 곰곰이 타고 올라가서 온갖 잘잘한 가지들조차 놓지 못하고 시선은 자꾸만 자꾸만

자기도 모르게 위로위로 향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잎과 하늘이 만나는 경계를 발견하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짧은 탄성을 질렀을 것이다.

밝은 햇살이 쏟아지는 빛의 마법에 머리가 어질어질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익숙해져있던 나무라는 오브제의 형상들과도 강렬하면서도 영원한 이별을 경험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작가가 발견한 새로운 세계는 하늘 보기라는 이름으로 우리 앞에 수줍게 드러난다.

새로운 하늘은 이미 좀 전의 그 하늘이 아니다.

하늘은 나무와 일체로 원피스 옷감과 같이 염직의 패턴과 같이 여성스러운 상상의 세계에서 저절로 단순해지고 이파리들은 가지에서 떨어져 물위에 뜬 나뭇잎처럼 ,그러나 질서있게 허공을 떠다니고 있다.

이때 중력은 더 이상 땅으로 향하고 있지 않고, 그렇다고 하늘로 떠오르는 것도 아니다.

중력의 완벽한 평형상태, 이것이 바로 이 작가가 하늘을 보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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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키의 그림은 다양한 변천을 거쳐 크게 4가지의 흐름으로 정립된다.

그 중 하나는 1990년대 중후반에 걸쳐 작가가 프랑스에 처음 건너갈 당시에 이미 프랑스 화단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구성적 기법을 이용한 신입체주의적 정물화 계통이고 여기에 인물이 접목된 한 갈래가 떨어져나간 것까지 합쳐 첫 번째 흐름을 이룬다.

낭만적이며 여성적인 감성이 풍부하며 부드럽고 비교적 구상적이다.

두 번째 흐름은 2000대 초반에 확립된 것으로 흔히 컴퍼지션이라는 테마로 그려진 추상에 근접한 일련의 작업들이다.

일반적으로 캔버스 대신 목판위에 크레용과 파스텔을 주재료로 하여 그렸고 때로는 유화물감과 아크릴 물감은 물론 미술용 시멘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재료의 혼합물이 실험되었다.

가장 파격적인 형태와 기막히게 화려한 색깔이 특징인 아름다운 작품세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던 것이 200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 이전의 밝고 화려하던 색의 세계가 갑자기 사라진다.

그새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흑백과 회색의 차가운 무채색 이미지들이 전위적이고 세련된 선의 세계를 드러내면서 무더기로 출현하기 시작한다.

이 그림은 그중 컴퍼지션 계열의 대표작으로 특이하게도 캔버스의 뒷면에 그려져 있는 것이 특징이며 화가의 전 작품을 통 털어 뒤집어 그린 그림은 이것 한 점이 유일하다.

또한 이 그림은 그간 알려지지 않은 재미있는 뒷얘기를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어찌 고호의 이야기만 흥미로울까?

사십대 중반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홀연 홀몸으로 파리로 떠나 갖은 고난끝에 프랑스에서 가장 권위 있는 미술대상에 빛나는 성공한 여류화가의 대표작에 얽힌 스토리 속으로 들어가 보자.

작가는 이 그림을 파리의 한 유명한 전시회장에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직접 그렸다고 한다. 그때까지 동양에서 온 조그만 여인이 꽤 실력을 갖춘 정도로 파리의 화단에서 나름의 자리를 굳혀가고 있었던 작가는 도불한지도 어느 듯 5년이 넘어가고 이제는 한국으로 돌아가던지 ,파리화단에서 성공하던지 둘 중하나를 선택해야 만하는 나름 절박한 시기였다고 한다.

마침 그 전시회에서는 화가들에게 장소와 원하는 화구, 재료일체를 제공하고, 주최 측이 홍보를 책임 질 테니 관객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진검 승부를 펼칠 화가를 공개적으로 모집하였는데 막상 아무도 지원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프랑스의 화가들로서는 이일이 일생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낯선 작업임은 물론, 섯불리 지원했다가 작품이 잘못되면 큰 망신을 당할 수도 있을 뿐 아니라, 과정 속에서 자신의 그림기법을 모조리 드러내는 것은 물론 동료작가들에게 공개적으로 모든 과정을 평가받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용기도 용기지만 작업자체가 일종의 큰 도박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실력이 없으면 없는 대로 자신이 없고, 있으면 있는 대로 그런 도박을 할 이유가 없으므로 아무도 지원자가 없음이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운명의 힘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다. 그 날 그 자리에 실력과 용기를 갖추고도 절박한 환경에 처해있기도 하였던 한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한미키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번쩍 들었다. “어차피 마지막이라 생각했어요. 이래죽으나 저래죽으나...” 당시를 회상하는 한미키 화백의 육성고백이다. "오직 이 자리에서 자신을 알리지 못하면 실패라는 누명을 쓰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차라리 이 자리에서 마지막으로 한번 죽도록 그림을 그려나 보자 ! " 그렇게 2박3일간 전시장 한 구석에서 오가는 사람들의 낯선 눈길을 받으며 작가는 모든 것을 걸고 그림에 몰두한다. “창피고 뭐고 몰랐다니깐, 오직 성공해야한다는 그 생각 밖에는... 지금도 그때 생각만하면 어휴.... ” 그렇게 화가는 일평생 다시는 되풀이 못 할 그림과의 사투에 돌입한 것이다.

일단 평범한 방법으로는 안되겠다는 결심을 하고, 당시로는 파격적인 퍼포먼스로 일단 100호짜리 대형 캔버스를 뒤집어 그리기로 하였다. 캔버스를 뒤집자 곧이어 나무테두리와 열십자 모양의 나무격자가 드러났다. 그 기이한 광경은 대번에 관람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들고 ‘도대체 어쩌려고 저러지?’ 하는 웅성거림이 들려오자, 화가의 등 뒤로 작가로서의 본능이 용솟음치며 소름이 끼치는 듯한 묘한 쾌감이 몰려왔다.

물론 아무생각이 없는 채로 무작정 달려든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에 새로 실험 중이던 깨진 도자기 파편이미지들을 이용한 컴퍼지션의 아름다운 선과 화려한 색상들을 표현하는 데는 목판이 제격인데, 막상 뒤집어 놓고 보니, 캔버스의 뒷면은 목판과 캔버스가 모두 갖춰져 있는데다가 나무격자들 때문에 화면이 자연스럽게 네 칸으로 분리되는 효과마저 있어서 이 두 재료를 다루는데 누구보다도 자신이 있었던 작가로서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쾌재를 불렀다. 일단 그리기 시작하면 과감하고 대담해야 했다. 화가는 크레용과 아크릴 시멘트까지 동원하여 다양한 재료를 마음대로 쓰면서 낯선 이국땅에서 겪었던 설움과 잡다한 스트레스를 미친 듯 풀어내면서 마음이 오히려 개운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첫째 날이 지났다.

그런데 다음 날 작업장에 도착해보니 한미키의 그림 쇼는 이미 전시장의 대 화젯거리가 되어있었다.

(이 역사적인 그림 쇼의 한 장면은 당시의 미술잡지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스냅 한컷 사진1 )


덕분에 둘째 날은 한층 마음이 차분해졌다. 원하는 것을 얻은 이상 화가의 손길은 더욱 단호하고 정교해졌다. 전날의 불안과 광기의 흔적은 화가의 차분한 손길에 하나하나 정리가 되어가면서 眞 馥 美 古典 吉 成 德과 같은 평소 마음에만 품었던 한자들도 새삼스럽게 떠올라 자연스럽게 화폭을 채워갔다. 그림이 점차 형태를 띄어가자 처음에는 일시적 만용으로만 보였던 뒤집힌 캔버스의 선택은 밭 전 자형(田)의 나무틀과 천의 질감의 확연한 대비효과가 일종의 입체적조형물이 되어, 화려하게 그려진 도자기의 파편들의 입체감을 더욱 돋보이게 하면서 묘한 시각적 쾌감을 주기 시작했다.

이런 모습은 더욱 더 주변의 관객들을 흥분시켜 뜨거운 반응을 불러 일으켰고 반응들은 다시 화가를 자극하는 일종의 흥분과 교감의 수레바퀴가 돌기 시작했다. 처음의 우려와는 달리 시도도 결과도 대성공이었다. 그렇게 희대의 걸작은 절박한 환경을 타개하려는 처절한 의지에서부터 화려하게 꽃을 피워나갔던 것이다. 완성된 작품은 대번에 화단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았고 훗날 그랑팔레 전시회에서 금메달을 받을 때에도 이 작품은 심사위원들의 깊은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몇몇 심사위원들은 당시의 그 작품을 거론하면서 마무리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표방하였지만 화가는 끝내 이 작품을 후보작으로 제출하지 않았다. 당시로서는 벌써 10년이 다된 지난 일이었고 작품을 마주 할 때마다 그 시절의 아픈 추억이 새삼 떠올랐기 때문에 두 번 다시는 보기 싫었다는 것이 화가의 변이었다.

작품은 그렇게 애증의 대상이 되어 화가의 파리 아틀리에 한 켠에서 최근까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가, 우연히 입수한 화가의 도록 속에서 어느 컬렉터의 눈에 띄게 됨으로써 비로소 빛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아래그림-작가의 도록에서 발췌)


Posted by 포털아트